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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1983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이만갑모아보기] 남한 주요 인사 17명 몰살 '아웅산 묘소 테러'! 생존자가 밝히는 테러 이유 | 이제 만나러 갑니다 499 회
https://www.youtube.com/watch?v=QX8cK4rStKk
1983년 10월 9일,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방문 중이던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암살을 시도한 북한의 폭탄테러.
1970~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는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특히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대한민국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위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은 이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외교전에 임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 때 미얀마는 제3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와 비슷한 체제인 북한과 우호적인 외교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 전두환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대양주 순방[4]에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지정하였다.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 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다 하는 의례행사로, 쉽게 말해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정상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 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 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8],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 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현지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이 대사가 탑승한 차량이 앞장서서 안내했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대통령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대통령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다.
미얀마 외무장관과 함께 묘소로 출발한 시각은 예정 시각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영빈관에서 묘소까지는 4.5km. 오전 일정이 대한민국 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 참배다 보니
스케줄이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닌지라 굳이 서두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 스케줄 지연이 전두환을 살린 것이다.
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전두환의 도착이 지연되자 장세동 경호실장[22] 또는
경호실 넘버 투인 천병득 경호처장의 요청[23][24][25]에 따라 행사 진행 전 시범 삼아 연주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러를 진행한 것이다.
스케줄 지연과 함께 전두환이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다.
나팔수가 시범 연주를 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그날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 공작원들은 정찰국내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불리는 '강창수 부대'[31]의 3인조로 김진수 소좌(일명 진 某), 강영철 대위(가명 강민철), 김치오 대위(가명 신기철)였다.
이들은 9월 17일에 5379톤의 북한 화물선 '애국 동건호'[32] 를 타고 랑군 부두에 왔다가 조용히 북한 대사관으로 숨어 들어 갔었다.
그리고 테러 3일전인 10월 6일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고 천장에 클레이모어 2개와 소이탄 1개를 매달았다.[33]
이후 3일간 근처에서 노숙하다가 묘소에서 1km 떨어진 영화관에서 원격조종장치를 누르게 된다.
김진수는 새벽 2시에 홀로 양곤 강을 헤엄치고 있었는데 새벽에 수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지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포위당한다.
김진수는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았는데 이 안전핀을 뽑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양곤 강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뱃사공 2명에게 돈을 주고 배에 승선했는데, 원래 타고 있던 주민 2명 중 한 명이 배가 너무 아프다며 복통을 호소하고는 배에서 내려서 풀 숲으로 갔다.
이후 복통을 호소했던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역시 포위당해서 강민철과 신기철은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신기철은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주했으나 얼마 못가서 또 포위당했다.
그러자 강민철도 김진수처럼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았는데 이 안전핀을 뽑는 순간 마찬가지로 수류탄이 터져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김진수와 강민철이 입은 이 중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둘 다 수류탄을 쥔 쪽 손이 파괴되어 외팔이가 된 것이며 이 중 김진수는 눈에 파편이 박혀 애꾸눈이 되었다.
던지려던 수류탄 2발이 오작동을 일으킨 이유는 북한이 살인멸구를 위해 안전핀을 뽑으면 수류탄이 바로 터지도록 손을 써놓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https://namu.wiki/w/%EC%95%84%EC%9B%85%20%EC%82%B0%20%EB%AC%98%EC%86%8C%20%ED%8F%AD%ED%83%84%20%ED%85%8C%EB%9F%AC%20%EC%82%AC%EA%B1%B4
대장동, 성남FC, 백현동, 정자동, 법인카드, 변호사비 대납, 대북송금, 돈봉투, 불법코인 사건도 주범을 꼭 잡아야 합니다.
[국민감사] 1983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https://cafe.daum.net/justice2007/Wy5y/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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