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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북한 ‘공화국 1호 영웅’ 성시백
성시백의 간첩 활동상을 정리해 보면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언론 선전공작이다.
그는 민심을 형성하고 장악하기 위해서 ‘조선 중앙일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의 신문사를 직접 운영하였다.
더욱이 영어, 중어, 프랑스판 화보 ‘해방조선’과 ‘조국통신’을 발행하여 국제여론 형성 공작까지 전개했다.
그는 군 침투 및 와해공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국방부, 육·해·공군,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 정보국 등에 광범위한 첩보망을 구축했는데,
1949년 5월 4일과 5일에 전방에서 강태무(6여단 8연대 1대대장)와 표무원(2대대장)이 대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도 성시백 작품이었다.
이외 공군 조종사 박용석(L-5형 비행기) 월북사건(1949년 9월), 미군 초계정 1900톤급 킴볼스미시호 월북(1949년 9월),
해군 소해정 강철호 월북(1950년 3월), 아군 비행기 2대 월북(1960년 3월) 등을 성사시켰다.
성시백이 구축한 군부 침투 첩보망에는 송호성(미군정 통위부 사령관, 국방경비대 참모장)의 여비서와 부관,
진해 해군통제부 부사령관, 헌병사령부 이용운 제독, 김석원 장군(제1사단장, 수도사단장), 2사단 정보참모 등이 있었다.
그는 남한 정권 핵심부에도 침투해 정보공작을 벌였다.
미 군정, 경찰, 주한미군 부대, 주미 공관, 대만 영사관뿐만 아니라 일본, 홍콩 등
해외에까지 정보조직선을 구축하여 정기적으로 정치, 군사, 경제 정보를 수집하였다.
1949년 8월 이승만과 장제스의 진해 비밀회담 정보와 1950년 2월 이승만과 맥아더 도쿄회담의 군사정보 자료까지 실시간으로 수집할 정도였다.
국회도 그의 공작 무대였다.
1948년 가을부터 남로당 쪽에서 국회공작을 착수했는데 김약수 국회부의장, 노일환 등
국회의원 13명을 포섭한 국회프락치사건(1949)이 발생했다.
당시 성시백은 남로당의 국회 프락치공작과 별개의 선으로 국회공작을 전개하여 황윤호 의원 등을 포섭,
외군(미군) 철회요청안과 남북평화통일안을 채택하는 데 기여했다.
성시백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1950년 5월)에서 10여명 정치인들의 출마를 지원하며 이들에게 1만4800달러의 선거자금 제공하였다.
당시 검찰은 남로당의 국회공작에 협조한 국회의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기소하여
15회의 공판 끝에 1950년 3월 14일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판결을 끌어냈다.
그러나 6·25 남침전쟁 때 혼란을 틈타 서용길 의원을 제외한 전원이 월북했다.
북한과 국내 종북세력들은 그간 국회프락치사건을 남한 수사당국의 ‘고문조작사건’으로 왜곡 선동해왔다.
그러나 북한이 1997년 5월 26일 자 노동신문에서
“성시백이 1948년 가을부터 남조선 괴뢰 국회공작에 힘을 넣었다”며 상세한 설명을 하면서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는 이른바 재정투쟁에서도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
그는 공작금을 충당하기 위해 56차례나 남북교역을 했는데,
1948년 2월 미군정이 남북교역을 금지하자 중국 청도의 조선상사(북로당 운영)를 통해 달러를 반입하고 직접 밀수선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여 전력난이 심화되었을 때는
2척의 밀수선을 운영하며 중국에서 직접 카바이트를 밀반입하여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체포 당시 총 3만9000달러, 현재 화폐가치로 20억원이 넘는 달러와 원화가 압수되었다.
그는 통일전선공작도 활발히 벌여 근로인민당을 비롯한 10개 정당과 그 산하 14개 단체로 13개 정당협의회를 묶어 반미·친북 통일전선체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외교공작도 펼쳐 신문과 출판물 제작으로 아세아국가들에 반제국주의노선을 전파하며 유엔임시위원단(UNTCOK·1947~1948) 활동을 무력화하였다.
북한은 남북회담 공작도 그의 업적으로 기술한다.
1948년 4월 평양 쑥섬에서 김일성이 주도하여 개최한 남북연석회의에 김구 선생을 설득하여 참여하도록 공작한 것도 성시백이었다.
중국에서 국민당을 상대로 공작할 때 인연을 맺었던 임정 고위간부들이 이를 도와주었다.
그는 결정적 시기에 봉기하여 남한을 교란시키기 위해 군 내부와 외부에 별동대를 구축하는 등 후방 적구(敵區) 공작도 펼쳤다.
비록 3년간이지만 성시백의 공작은 1950년 5월 15일 경찰에 체포되며 막을 내렸다.
당시 서울시경 사찰과와 치안국 중앙분실은 남로당 계열이 아닌 또 다른 간첩망이 암약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1949년 5월부터 집중 내사를 벌여 1950년 2월 10일 성시백 지하망의 부총책 겸 비서 격인 김명용을 체포하면서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의 실체를 파악했다.
같은해 2월 12일 경찰, 검찰, 군이 합동회의를 통해 합동수사대를 꾸리고 성시백 체포작전에 나서
1950년 5월 15일 새벽 3시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의 비밀아지트인
서울시 종로구 효제동에 은신해 있던 성시백을 서울시경 사찰과 대공수사관들이 체포하었다.
성시백과 함께 1차로 검거된 인원만 112명이였다.
이들 가운데 직업적 당원이 60명이었고 교원 7명, 농업 9명, 의사 1명, 공무원 1명, 광업 1명, 상인 8명,
학생 4명, 직공 2명, 미대사관 3명, 회사원 3명, 무직 7명 등이었다.
또한 금괴 80개, 무전기 3대, 권총 2정, 보증수표 30만원권 1장, 미화 1만4800달러, 승용차 1대,
가택 15동, 선박 2척, 이발소 2개, 현금 60만원, 조직문건 2권, 정보문건 9건, 저금통장 2개 등을 압수했다.
성시백은 1950년 5월 9일 군사재판에서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6·25 남침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45세 나이로 처형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매우 애통해하면서 전쟁 중인 1950년 6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정령을 통해 성시백에게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수여했다.
1951년 7월 17일에는 북한의 최고훈장인 국기훈장 1급을 수여했다.
또한 평양 신미리 소재 애국열사릉에 그의 가묘를 만들어 추앙하고 1990년 조국통일상을 제정했을 때 성시백을 1호 수상자로 결정했다.
1990년부터 북한은 성시백의 일대기를 다룬 ‘붉은 단풍잎’이란 드라마를 7부작으로 제작하여 방영하였다.
성시백의 부인(민순임)과 아들들은 6·25 때 월북하여 영화를 누렸다.
큰아들 성세창은 통일전선부 간부로 근무하다 사망했고, 둘째 아들 성녹창은 북한군 정치장교로 복무했다.
막내 아들은 성자립인데 이름을 김일성이 직접 작명해주었다.
1948년 성시백이 2차 월북했을 때 김일성은 성시백 가족을 초대했는데 당시 출생한 막내 아들을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 ‘자립(自立)’이라고 지어주었다.
성자립은 2004년 김일성종합대 총장이 되었고.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성시백의 대남공작상은 70년이 훌쩍 넘은 현재에도 북한 대남공작의 핵심 과업으로 실행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북한 ‘공화국 1호 영웅’ 성시백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97
대장동, 성남FC, 백현동, 정자동, 법인카드, 변호사비 대납, 대북송금, 위증교사, 돈봉투, 불법코인, 태양광 사건도 주범을 꼭 잡아야 합니다.
[국민감사] 북한 ‘공화국 1호 영웅’ 성시백
https://cafe.daum.net/justice2007/Wy5y/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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