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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황의 생각모음

[국민감사] '류위완' 비망록 이어 ‘레베데프 비망록’에 등장한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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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류위완' 비망록 이어 ‘레베데프 비망록’에 등장한 김구

‘류위완 비망록’과 함께 주목되는 또 다른 기록은 당시 소련군정의 최고책임자 중 한 명이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별 하나)이 남긴 이른바 ‘레베데프 비망록’이다. 
레베데프는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 직후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 제25군의 군사위원으로,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별 셋),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으로 
후일 초대 주북 소련대사를 지낸 테렌티 시트코프 상장(별 셋)과 함께 
김일성을 앞세운 북한 정권수립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기획하고 실시한 인물도 소련군 정치장교였던 레베데프로 알려져 있다.

당시 북한에 들어간 레베데프는 제2차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있었던 1947년 5월 14일부터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1948년 12월 26일까지 약 1년7개월간 북한에 머물며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개인메모 형태로 기록했다. 
이 비망록은 한·소수교(1990) 이후 소련 모스크바를 찾아가 레베데프를 인터뷰한 국내 언론(중앙일보)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92년 레베데프가 사망한 이후인 1995년경에는 한 국내 언론(매일신문)에 의해 그 전문이 한글로 번역돼 소개된 바도 있다.

한데 ‘레베데프 비망록’에는 김구의 1948년 4월 방북이 소련과 김일성의 의도에 철저히 이용당했다고 비칠 소지가 있는 내용이 적지 않다. 
심지어 비망록 중에는 남한 우파 진영의 양대 지도자였던 이승만과 김구를 직접 만난 레베데프가 이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도 나와 있다. 
“외모에 교양이 있어 보였고, 그의 아내는 미국인(실제로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이승만), 
“유일하게 조선민족 옷을 입고 있는 사람으로 무서운 깡패 같다”(김구)는 부분이다.(1947년 5월 23일) 
‘김일성 전기’의 저자인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책임연구원은 
“한국어 번역본에는 ‘산적’이라고 소개된 바 있는데, 실제 어감은 ‘깡패’ ‘범죄자’ 정도의 의미”라고 했다.

레베데프 비망록에 따르면, 김구의 1948년 4월 방북도 소련군정 최고책임자인 시트코프와 레베데프가 공동연출하고, 
김일성이 주연을 맡은 ‘남북연석회의’란 한 편의 연극에 들러리를 선 것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1948년 5·10 총선거가 임박해오자 우파 진영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이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방북을 감행한다.

한데 이 회의 자체가 당시 남북한 좌우 진영의 지도자들이 
김일성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으로 올라오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소련 군정 측 기획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과 김일성이 노렸던 가장 큰 목표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가장 크게 반발했던 김구였다. 
레베데프 비망록에 따르면, 시트코프는 “김구가 꼭 회의에 참석하도록 할 것” 
“김구의 대리인과 만나 김구의 경호문제를 협의할 것”(1948년 4월 8일)이라고 지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같은날 레베데프 자신이 김일성에게 지시했다는 “김구와의 회담을 꼭 관철시킬 것”이라는 기록도 확인된다. 
김일성 역시 시트코프와 레베데프의 지시 전날인 4월 7일에 “김구가 올 때까지 대표자 회의는 연기한다. 
김구가 꼭 와야 하고 우리는 그를 기다릴 것이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비망록은 적고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에는 소련과 김일성이 김구를 ‘늙은이’ ‘어리석은 인간’ 등으로 하대하는 부분도 등장한다. 
김일성이 레베데프에게 제안한 “두 늙은이(김구, 김규식)의 대회 참여를 가능하게 해줄 것”(1948년 1월 22일)이란 부분과, 
“어리석은 인간 김구이기 때문에 반드시 만날 필요가 있고 그를 설득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동의할 것이고 심지어 북쪽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1948년 3월 12일)는 부분이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원문에 나오는 말은 노인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라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늙은이’ ‘늙다리’ 정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각각 1876년과 1881년생으로 1948년 당시 각각 만 72세와 만 67세였다. 
1912년생으로 1948년 당시 만 36세에 불과했던 김일성에게는 이들이 ‘늙은이’로 보였고, 
이에 ‘늙은이’란 표현을 입에 달고 산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인지 비망록에는 남북연석회의 당시 별도로 열린 ‘4김 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참석자였던 김두봉이 김일성을 향해 
“무엇 때문에 항상 그 사람(김구)을 욕하느냐”라고 지적하는 부분도 나온다. 
한글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북조선노동당(북로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두봉은 1889년생으로 당시 만 59세였다. 
만 36세에 불과한 김일성이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를 하대하는 것이 내심 불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소련군정은 김구와 김규식을 옹호하며 극진히 대접하는 김두봉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김구와 김규식 앞에서 절대 굽신거리지 마라” “김두봉의 노선을 상세히 파악해두라. 또 누가 그런 노선을 견지하는가”(1948년 4월 26일)라는 시트코프와의 대화를 기록한 대목이다. 
레베데프는 “왜 김두봉이 남측 대표들과 식사를 자주 하는지 김일성에게 물어봐야겠다”(1948년 5월 3일)고 별도로 메모하기도 했다.

결국 김두봉은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때만 해도 김일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초대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까지 맡았으나 
결국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를 숙청한 직후에 별도로 숙청됐다. 
연안파였던 김두봉은 김일성의 정적이었던 박헌영(국내파), 허가이(소련파) 등과 함께 조선대백과사전에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련 군정당국과 김일성은 남북연석회의 석상에서 김구가 ‘폭탄발언’으로 판을 깰까 봐 이른바 ‘플랜 B’까지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연석회의’ 개회식이 열린 1948년 4월 19일의 기록으로, 
“김구와 그의 측근들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어떻게 하나. ‘나가라’고 하고 그들을 미국간첩으로 몰자”고 한 대목이다.

같은날 38선을 넘어 방북한 김구는 김일성·김두봉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 회의(남북연석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김일성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며 회의에 단순한 들러리는 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 
당시 남한 내 우파진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방북을 감행한 김구는 38선을 넘는 과정에서 북측 보안원(경찰)에 의해 일종의 수모까지 당한 터라 심기가 편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레베데프는 “김일성의 보고에 의하면 김구와 김규식 두 늙은이는 38선에서 보안원이 불순하게 대한 것에 대해 격분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김구에게 ‘반동분자를 옹호한다’고 욕설을 퍼부었다”(1948년 4월 23일)고 기록했다. 
김구 역시 남북연석회의 5분발언에서 “당신 나라는 대체로 좋은데 보안원이 무례하다. 청년들도 마찬가지”(1948년 4월 22일)라고 작심발언을 했다고 비망록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김구는 남북연석회의 이후 김일성과 별도 회담을 관철시킨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독립당(한독당) 당수 자격으로 방북한 김구는 남북연석회의 직후 김일성과 이뤄진 약 1시간30분간의 단독회담에서 
북한에서 체포된 한독당 당원들의 석방과 가택연금 중인 조만식의 남한행을 요구했다.

이어 “나는 늙은이다. 나를 아껴야 한다”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한에서 나에게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가”(1948년 5월 3일)라고 발언했다고 비망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어 레베데프는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답했다”고 기록했다. 
김구가 김일성과 별도로 만난 자리에서 유사시 북으로 망명을 타진했다고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란 항목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남조선의 민족주의자 김구를 만나 주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고 기술하며 
김구가 김일성의 뒤를 따르는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책임연구원은 
“레베데프 비망록은 시트코프의 일기와 함께 북한 김일성 정권을 탄생시킨 
소련군정 1인자(시트코프)와 2인자(레베데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료”라며 
“비공식적인 어투의 메모 형태로 되어있는 레베데프 비망록은 스탈린에 대한 표현마저 담담히 쓸 정도로 ‘시트코프의 일기’에 비해서도 솔직함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류위완' 비망록 이어 ‘레베데프 비망록’에 등장한 김구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70&utm_source=d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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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류위완' 비망록 이어 ‘레베데프 비망록’에 등장한 김구
https://cafe.daum.net/justice2007/Wy5y/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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